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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지난해 11월 1.9%에서 지난달 0.4%포인트 내렸다. 성장률이 1954년 통계 작성 이후 2% 아래로 내려간 때는 1956년 0.6%, 1980년 마이너스 1.6%, 1998년 마이너스 5.1%(외환위기), 2009년 0.8%(금융위기), 2020년 마이너스 0.7%(코로나19), 2023년(1.4%) 등 여섯 차례뿐이다. 영국 경제연구기관 캐피털이코노믹스(CE)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우리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1%에서 1.0%로 하향 조정했다. 국제금융센터가 파악한 글로벌 투자은행(IB) 8곳의 성장률 전망 평균치 1.6%보다도 크게 밑도는 수치인 데다 가장 낮게 내다본 JP모건의 전망치 1.2%보다 크게 밑도는 참담한 수치다.
코로나 종료 후 경제가 탄력성을 회복하고 성장률이 상당히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는 점차 물거품이 되는 것 같다. 시장에서는 이러다가 경제가 심각한 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내려 냉각돼 가는 경기를 살려보겠다고 나섰지만 시장은 오히려 기준금리 인하에 따른 경기침체 확인 부작용을 더 걱정하는 분위기다. 기준금리의 과도한 인하는 환율·물가·가계부채관리 등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경기를 살리려면 금리인하와 함께 재정정책이 뒤따라야 한다. 금리인하에 이어 추가경정예산도 편성해 즉시 시행하도록 해야 경기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추경 편성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올해 1.5%의 성장 전망은 상당히 뉴트럴한(중립적인) 수준"이라고 했다. 미국의 이른바 '관세전쟁'발 무역갈등이 심화하면 더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을 담은 발언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사상 초유의 정치적 격변을 겪고 있다. 지난해 말 비상계엄 선포 사태가 벌어져 경제가 불확실성의 터널을 걷고 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관세 전쟁이 촉발되면서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의 교역 여건이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불확실성이 증대돼 경제 주체들이 탄핵심판 결과와 그 후폭풍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탄핵이 몇 대 몇으로 결론 날지 먼저 묻는 게 일상화된 요즘이다.
형편이 어렵다고 성장률 전망치의 속절없는 하락에 넋 놓고 있어서는 당연히 안 된다. 지금이라도 정치권과 정부가 힘을 모아 경제가 탄력성을 회복하도록 민생 관련 법안들을 조기에 처리하고 추경에 속도를 내야 한다. 여야정 국정협의회 4자 회담을 서둘러 진행해 경제 현안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처리해야 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타격을 받는 계층은 주로 소득 수준이 낮거나 영세한 자영업자다. 늘 그렇지만 한계선상에 있는 경제주체들은 경기침체라는 외부적 타격에 버티기 힘들다. 폐업하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경기침체가 이어지면 중산층도 위협받기 마련이다. 경제의 버팀목이 되는 중산층이 경기회복 지연으로 소비를 줄이는 등 경제활동을 위축시킬 경우 성장률은 더 하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는 사이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초고가 부동산은 신(新)고가를 거듭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부동산 거품이 확산하면 괜스레 우리의 부가 확대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착시 소비'가 야기되기도 하겠지만 경제에는 긍정적이지 않다. 사회의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진 제도학파의 주요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개인은 이성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제도와 관습의 영향을 받아 소비한다고 말했다. 낮은 성장률 속에 자산의 거품이 발생할 경우 이성적 판단에 따른 합리적 소비 대신 분위기에 따라 소비에 나설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장률 둔화는 일자리 감소와 직결돼 있다. 정치권·정부가 먼저 성장률 제고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국민의 고통 분담을 얘기할 수 있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1992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 진영에서 내걸었던 선거 운동 문구가 귓가에 쟁쟁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