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1 | 0 | 모국어를 빼앗긴 시대를 연기하는 '국어의시간' 배우들. / 사진 극단 백수광부(白首狂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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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극단 백수광부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언어 상실과 정체성 혼란을 그린 연극 '국어의시간'을 8일부터 17일까지 CKL스테이지에서 선보인다. 본 작품은 일본 작가 오리 키요시의 원작('國語の時間')을 배우이자 번역가 린다전이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마터', '다방' 등으로 독창적인 연출 세계를 선보여 온 하동기 연출가가 무대를 맡았다.
'국어의시간'은 1940년 경성의 한 소학교를 배경으로, 조선인 교사들이 일본식 이름과 언어로 살아가며 겪는 내면의 갈등을 조명한다. 조선총독부의 감시 아래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을 독려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칠판에 한글로 쓰인 낙서 사건이 발생하며 교사들 사이의 긴장과 의심이 증폭된다. 작품은 모국어를 박탈당한 식민지 조선인의 비극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려낸다.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수행되는 지배 권력의 메커니즘과 이를 내면화하며 살아가는 피지배자의 심리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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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공연은 전막 일본어로 진행되며, 한국어 자막이 동시에 상영된다. 극단 백수광부는 창단 30주년을 앞두고, 단원들이 일본어를 직접 습득하고 훈련하며 작품에 몰입해왔다. 단순히 언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제강점기 당시의 언어적 억압 상황을 관객이 체험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전막 외국어 공연이라는 실험적인 방식은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함과 동시에, 극 중 인물들의 고통과 갈등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는 장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어의시간'의 원작자 오리 키요시(折 圭志, 1972년생)는 일본 현대 연극계에서 꾸준히 활동해 온 극작가로, 사회적 맥락과 인간 내면의 모순을 깊이 탐구하는 희곡을 다수 발표해왔으며 대표작인 '국어의 시간'은 약 3년에 걸친 집필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일본 연극계에서도 드물게 식민지 조선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작품으로 주목받았으며, 2013년에는 일본의 극단 후우킨코우보(風琴工房)의 창단 20주년 기념작으로 도쿄 자-코엔지(座-高円寺) 극장에서 초연되어 요미우리 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조선인 교사라는 인물 설정, 식민지 교육 현실에 대한 고찰, 그리고 언어의 의미를 탐구하는 작가의 시선은 일본 내부에서도 이례적일 정도로 깊고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03 | 0 | 연극 '국어의시간' 연습 현장. 극 중 인물들의 감정과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을 담아낸 장면. / 사진 극단 백수광부(白首狂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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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무대에는 이하늘(야나기), 이산호(카이), 권다솔(하리모토), 홍상용(네기시), 심재완(치요다), 박제훈(키노시타), 송유준(마루오), 린다전(히노), 김두은(가네무라), 서별(이토우), 최줄리(테츠) 등 총 11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이들은 모두 경성의 한 소학교에서 일본어 교육과 창씨개명을 수행해야 하는 조선인 교사들로, 일제의 억압과 감시 아래 복잡한 감정과 윤리적 갈등을 드러내며 무대의 긴장감을 이끈다.
배우들은 장기간의 일본어 발성 훈련과 감정 분석을 병행하며, 언어적 억압과 모국어 상실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전막 일본어로 진행되는 이번 공연에서, 이들의 연기는 단순한 배역 전달을 넘어, 언어를 둘러싼 시대의 긴장과 침묵, 저항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낼 예정이다.
이러한 배우들의 몰입과 함께, 공연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창작진이 힘을 보탰다. 드라마터그 배선애, 무대디자인 주미영, 조명 신동선, 의상 박인선, 음악 김선, 영상 강경호, 그래픽 최희연, 사진 윤헌태가 창작진으로 참여했으며, 기획 박성원, 조연출 황윤진·안시연, 무대감독 이형우가 제작을 함께한다. 제작진과 배우들은 장기간의 창작 회의를 거쳐 대본과 장면을 유기적으로 조율했으며, 언어와 침묵 사이의 긴장감을 섬세하게 구현하기 위해 디테일한 장면 구성에 공을 들였다.
'국어의시간'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주체사업과 한국콘텐츠진흥원의 후원으로 국내 초연되며, 특히 이번 공연에는 원작자 오리 키요시가 내한해 일부 회차에서는 관객과의 대화(GV) 시간도 예정되어 있어, 창작자와 관객 간의 직접적인 소통 기회로도 주목된다.
 | 05 | 0 | 연극 '국어의시간' 연습 현장. 극 중 인물들의 감정과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을 담아낸 장면. / 사진 극단 백수광부(白首狂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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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6 | 0 | 연극 '국어의시간' 연습 현장. 극 중 인물들의 감정과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을 담아낸 장면. / 사진 극단 백수광부(白首狂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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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을 선보이는 극단 백수광부(白首狂夫)는 고대 가요 '공무도하가'에 등장하는 '술 마시고 춤추며 바다로 들어가는 백발의 미친 늙은이'를 상징으로 삼아 1996년 창단됐다. 장정일의 시집을 해체·재구성한 데뷔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비롯해, 배우의 몸과 즉흥에 기반한 공동창작 작품 '굿모닝? 체홉', '야메의사', '햄릿아비'와 문학적 텍스트에 기반한 '여행', '봄날', '미친극', '과부들', '마터'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창작 작업을 펼쳐왔다. 백수광부는 '해체된 일상의 낯섦과 강렬한 시적 충동이 공존하는 무대'를 지향하며, 매 작품마다 새로운 형식 실험과 서사의 해체를 통해 동시대 관객과의 예술적 접점을 모색해 왔다.
'국어의시간'은 이러한 백수광부의 연극 철학이 집약된 프로젝트이자, 언어와 역사, 공동체와 윤리를 사유하게 하는 무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단지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언어라는 감각의 토대를 통해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의 언어로 말하고, 누구의 기억으로 존재하는가. 무대 위에서 억눌리고 삭제된 말들은 과거를 지나 현재를 가로질러, 우리 각자의 내면으로 되돌아온다.
광복절을 앞둔 8월, 연극 '국어의시간'은 단순한 역사극의 틀을 넘어, 언어가 억압당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고뇌와 침묵, 그 안의 목소리들을 다시 불러낸다. 그것은 단절된 말의 시간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이름과 존재의 서사를 복원하려는 연극의 시도이자, 지금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기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되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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