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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눈] 한겨울 유엔군 묘지에 심어진 청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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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준 기자

승인 : 2025. 02. 12. 15:31

전원준 건설부동산부 기자
고(故)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남다른 위기 대응 능력이 드러나는 일화 중 하나다.

정 회장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겨울 미8군 사령부로부터 재한유엔기념공원 묘지(이하 유엔군 묘지) 단장 공사 의뢰를 받았다.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 일정에 맞춰 불과 닷새 안에 묘역 일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달라는 것이었다.

유엔군 묘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4월 유엔군 사령부에 의해 조성됐지만, 황량한 벌판에 십자가만 꽂혀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 당선인이 미국 본토 밖의 최전선을 시찰한 것이 최초였던 만큼, 최소한의 구색은 갖춰야 한다는 게 미군 입장이었다.

정 회장은 '잔디'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는 "묘역에 파란 풀만 있으면 되나?"라고 되레 미군에 당당하게 물었다고 한다. 풀만 파랗다면 상관없다는 답을 들은 정 회장은 30대의 트럭을 낙동강변으로 보내 엄동설한에도 파릇파릇하게 피어 있는 청보리를 사다가 묘역에 옮겨 심었다. 이후 미군은 대만족하며 정 회장에게 예정된 공사비의 3배를 지급했다. 아울러 향후 미8군에서 진행된 공사는 모두 정 회장의 것이 됐다.

작금의 건설 보릿고개를 넘고 있는 건설사들이 이 일화를 곱씹어보길 권한다. 국토교통부 시공능력평가 상위 10대 대형 건설사 중 최근 지난해 실적을 발표한 삼성물산 건설부문·현대건설·대우건설·DL이앤씨·포스코이앤씨·HDC현대산업개발은 전년보다 영업이익이 떨어졌거나 적자로 돌아선 실정이다.

지방 중견·중소 건설사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폐업을 신고한 종합 건설 업체 수는 총 641곳으로, 조사가 시작된 2005년(629건) 이후 가장 많은 수치다. 연도별로도 2021년 305건, 2022년 362건, 2023년 581건 등에 이어 늘고 있다. 올해 들어서도 벌써 75곳의 종합 건설 업체가 폐업을 신고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경남지역 2위 대저건설, 전북지역 4위 제일건설, 부산지역 7위 신태양건설에 이어 시평 58위 중견 건설사 신동아건설 등이 법원에 법정관리(기업 회생절차)를 신청하기도 했다.

당분간 건설업 불황이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탄핵 정국으로 인해 내수 경기가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본격적인 관세 전쟁을 펼치고 있는 데 따라 세계경제 역시 불안한 형국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및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촉발된 고물가·고금리에 더해 고환율이라는 겹악재를 맞았다. 일각에선 연내 대형 건설사마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을사년 새해 건설업계 수장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고 입을 모았다. 건설업계가 새 해외 시장 개척·신사업 발굴·신기술 개발 등 저마다의 '청보리'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전원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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