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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일담] 반도체 경쟁, 한국만 불리한 조건에서 뛰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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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기자

승인 : 2025. 12. 17. 16:04

김영진
김영진 산업1부 기자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은 이미 기술력만으로 승부를 가리는 단계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누가 더 빠르게 움직이고, 유연한 제도와 정책을 갖췄느냐가 경쟁을 좌우하는 국면입니다. 기술은 기본값이 됐고 제도와 자금, 정책 실행 속도까지 함께 경쟁하는 구조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최근 국회에서 논의된 반도체특별법에서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조항이 빠진 결정은 업계에 적잖은 허탈감을 안겼습니다. 해당 조항 하나로 산업의 성패가 갈린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반도체 산업 특성상 글로벌 경쟁 환경을 고려한 제도 논의가 늘 뒤로 밀리고 있다는 인식이 반복되고 있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업계의 불만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보조금 경쟁으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상황에 모래주머니까지 차고 경쟁하라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어 "지원을 약속했으면서 정작 필요한 조항은 제외됐다"며 "중국은 100조원대 투자를 예고하는데 국내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제도 때문에 못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습니다.

글로벌 경쟁국들의 움직임을 보면 이런 불만을 단순한 엄살로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은 반도체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규정하고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을 통해 대규모 보조금과 세제 혜택, 규제 완화 정책을 집행하며 기업들이 기술 개발과 양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만 역시 TSMC를 중심으로 연구·개발 인력을 법과 제도 안에서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구조를 이미 갖췄고, 신공정 전환 등 집중 투입이 필요한 국면에서 제도가 발목을 잡는 일은 드뭅니다. 중국도 반도체 기술 자립을 목표로 2000억~5000억 위안 규모의 보조금·금융 지원 패키지를 검토 중으로, 최대 100조원대 자금이 거론되는 등 글로벌 경쟁국들은 제도와 자금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직접 경쟁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안고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습니다. 보조금 규모와 정책 속도에서 이미 격차가 존재하는 가운데, 근로시간처럼 핵심적인 운영 요소마저 경직된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업계의 체감 불안을 키웁니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특정 시기에 인력과 시간이 집중적으로 투입되지 않으면 기술 격차가 빠르게 벌어지는 구조입니다. 한 세대, 한 노드를 놓치면 그 차이는 수년간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주 52시간 예외 논쟁의 본질도 장시간 노동 여부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선택지를 쓸 수 없게 만드는 제도적 제약에 있습니다. 미국과 대만, 중국이 각자의 방식으로 제도와 자금을 총동원해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동안, 한국만 논쟁에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현재 한국 반도체 산업은 선택의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국면에 서 있습니다. 기술의 속도를 제도가 따라가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정책과 사회가 내놓아야 할 시점입니다.
김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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