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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섬이의 거짓말’, 그 결단의 고요함을 채운 이다솜의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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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2. 17. 14:52

말하지 못한 존재의 시간을 꺼내는 무대, 다시 불려야 할 이름을 위한 서사
이다솜이 설계한 감정의 흐름, 침묵으로 완성된 여성 서사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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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모시는 사람들
극단 '모시는사람들'이 15년간 이어온 '조선여자전' 시리즈가 올해 마지막 작품 '춘섬이의 거짓말'로 종지부를 찍었다. 홍길동의 어머니로 짧게 언급되었던 한 여인의 삶을 정면으로 소환한 이 작품은, 단지 고전을 재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성의 생존과 침묵,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날카롭게 비추며 무대 위에 오늘의 질문을 세운다.

그 중심에 선 배우가 있다. 춘섬 역을 맡은 이다솜은 이번 무대를 통해 10대의 연약함과 어머니의 단단함을 오가며, 시대의 억압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인물을 그려냈다. "가장 먼저 다가온 감정은 설렘이었어요"라는 말처럼, 이다솜은 춘섬이라는 인물을 온전히 품은 채, 그 고요한 결단의 여정을 관객과 함께 걸어냈다.

그가 처음 춘섬으로 무대에 선 장면은 갈대밭에서 개불이와 함께하는 장면이다. "아름다운 갈대밭 속에서 개불이와 함께하는 첫 장면은 연습실에서 상상만 하던 공간이 실제로 펼쳐지는 순간이라 더 기뻤어요. 풀벌레 소리와 둥근 달빛 같은 디테일까지 느껴지니 모든 게 참 낭만적으로 다가왔죠. 장면이 시작되기 전에는 소대에서 미리 개불이와 손을 잡고 달려보며 공간과 호흡을 체감해보기도 했는데, 그때부터 무대 위에서 춘섬이로 살아간다는 것이 실감났어요." 배우 이다솜은 낭만의 감각으로 첫 장면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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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모시는 사람들
하지만 이 설렘은 곧 춘섬이라는 인물이 겪는 침묵의 무게로 전환된다. 부모와 매파가 자신의 미래를 거래하는 장면, 여느 시대의 소녀라면 고함이라도 지르고 반항했을 법한 상황에서 춘섬은 다만 조용히 '예'라고 대답한다.

이다솜은 이 침묵의 감정을 섬세하게 구축했다. "처음에는 춘섬이의 적대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었어요. 눈빛에 불만을 담고, 움직임에도 거친 기색을 넣으려 했죠.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심부름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그 감정은 지금의 제가 느끼는 해석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 시기의 춘섬이는 당황스럽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인물이더라고요. 얼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날 것 같아도, 조용히 '예' 하고 움직이는 선택이 오히려 더 마음을 아프게 했어요." 이러한 절제는 춘섬이 선택한 거짓말의 무게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홍길동의 어머니'라는 틀을 넘어서기 위한 배우의 작업도 깊이 있었다. "홍길동전을 다시 읽으며 춘섬이에 대한 작은 단서들을 찾는 데서 시작했어요. 재주와 덕행이 뛰어나고, 순박하면서도 곧고 정직한 인물로 그려지더라고요. 그 묘사를 바탕으로 생김새나 말투를 하나씩 상상하며 입체적인 인물로 세워갔어요."

이다솜은 단지 기능적인 어머니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춘섬을 그리려 했다. 특히 대본 속 춘섬이의 대사를 통해 인물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짚어나가며, 관습적인 모성의 틀 너머를 탐색했다.

그런 점에서 이다솜이 가장 강하게 '여성의 생존 서사'를 느낀 장면은 춘섬과 어머니가 마주하는 '화로 장면'이었다. "화로 장면은 단순히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춘섬이가 자신의 몸과 삶을 지키기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주체적인 결단이에요.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춘섬이, 엄마의 흉터를 보고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어요. 누구의 강요도 없이, 처절하게 좁아진 삶의 가능성 속에서 스스로 내린 결단이라 생존의 의지도 강렬하게 드러나요. 하지만 동시에 엄마의 선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마음 깊은 곳까지 아프게 다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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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모시는 사람들
이 작품을 연기하며 가장 놀라웠던 것은 춘섬의 이면에 깃든 십대 소녀의 일상성이었다고 한다. "초반에 집중한 건 춘섬이도 십대의 일상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이었어요. 백중날 같은 특별한 날에는 기뻐하고, 연인을 사랑하며 만나지 못하면 그리워하고, 어른들을 무서워하면서도 세상을 원망하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서툰 십대의 모습이요. 연습을 거듭하면서 점점 춘섬이가 그 시대 속에서 얼마나 용기 있는 선택을 했는지 느껴져서 놀랐어요." 이다솜은 결국 뱃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건 이 인물을 '비범한 십대'로 정의했다.

극 중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과의 감정선도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체화됐다. "연습 과정에서부터 선배님들이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시고 세심하게 도와주셨어요. 무대에서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연대를 느낄 수 있었고요. 특히 화로 장면에서는 어머니 역을 맡은 선배님들과 눈만 마주쳐도 눈물이 떨어질 만큼 감정이 북받쳤어요. 소대에서 옷을 입혀주시는 딸끝네 선배님의 손길, 너럭바위 너머 쫑쫑이 선배님의 목소리까지… 그 순간들이 저에게 큰 힘이 되고 애틋함으로 다가왔어요." 무대 위 감정이 단지 연기가 아닌 '함께 겪는 현실'로 다가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대를 준비하며 그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했다고 고백한다. "저는 늘 자신을 채찍질하며 연기해왔어요. 춘섬이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큰 사건들을 겪는 인물이었기에 그 차이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연습 과정에서 연출님과 선배님들, 그리고 동료 배우들이 진심 어린 믿음과 힘을 건네주셨죠. 그러면서 저 스스로를 믿어주는 순간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어요.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거울을 보면서 '춘섬아, 내 용기가 너무 작아서 미안해. 나 좀 도와줘.' 하고 조용히 속삭이기도 했어요." 이 말은 이다솜이 춘섬이라는 인물과 얼마나 깊이 교감했는지를 보여주는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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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모시는 사람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춘섬이처럼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인물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았지만, 사랑과 두려움, 기쁨과 설렘 같은 감정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했던, 이름 없이 살아간 무수한 '춘섬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전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과거의 춘섬이와 지금의 우리는 사실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함께 느껴주길 바랐어요"라는 소망도 전했다.

'춘섬이의 거짓말'은 2026년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으로 이름을 올렸다. 다시 관객과 마주할 이 무대는, 역사의 음지에서 이름 없이 사라졌던 여성들의 존재를 꺼내 보여주며 지금 이곳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배우 이다솜은 그 무대의 중심에서 침묵과 결단의 감정을 입체적으로 끌어올렸고, 그의 춘섬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생존의 윤리를 되묻는 인물로 오래 남는다. 무대 위의 침묵이 말보다 더 큰 목소리로 다가왔던 순간들처럼, 이다솜이 그려낸 춘섬 역시 관객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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